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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립조선족촌이 세워지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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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개요
《신립조선족촌이 세워지기까지》


▲ 신립촌 옛모습▲ 신립촌 옛모습


▲ 초가집, 기와집우에 현대화한 아빠트단지가 조성중

구태시 구교가두 신립촌은 500여세대에 1700여명 인구를 가진 순 조선족촌으로서 산재지역에서는 비교적 큰 민족촌이다.

구태시 신립조선족촌은 조선족산재지역에서 새농촌건설과 조선족집중촌의 시범촌으로 유명하다.

이제 여기서 이 유명한 마을이 어떻게 세워졌는가 하는 력사를 파보기로 한다.

신립촌은 1960년 1월 1일에 정식 창건되였다.

촌이 건립되기 전 이곳을 후소툰(后小屯)이라 불렀는데 1950년 초반에 현에서 많은 지식청년들을 배치하여 농장을 세우고 청년집체농장이라 불렀기에 후에 이 곳을 계속하여 청년농장이라고 불렀다.

이 농장에는 수백헥타르의 황무지가 있었기에 현에서는 여기에 농장을 세우고 많은 자금을 투자하여 개발하려 했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토지면적은 많지만 전 벌판이 모두다 소택지기에 알칼리성이 높아 풀도 잘 자라지 못하고 근근히 내알칼리성이 강한 부들이나 갈대(芦串)만 약간 자랄수 있었다. 게다가 수원이 없고 배수할수 없으므로 수전농사도 한전농사도 할수 없는 황지였으며 누구나 감히 개간하겠다고 달려들지 못하는 곳이였다.

청년농장을 세우기 전 이 곳에는 조선족 30여세대가 농업사를 꾸리고 비교적 좋다는 곳만 찾아 논을 10여헥타르를 풀고 비물을 받아 벼농사를 지으면서 겨우 생계를 유지해왔다.

1957년도부터 구태현정부에서는 구태진 남북에 있는 많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수전생산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전국 각지로부터 많은 조선족들을 받아들였다.

그해 봄에 남쪽 오가점(喬家店)의 근 200세대, 북쪽 상가소과에 140여세대가 입주했는데 남북은 비록 부동한 향에 귀속되여 통일령도를 할수 없었지만 같은 민족, 같은 처지에 있기에 늘 련계가 있었으며 서로 관심하며 같이 발전했다.

당시 주요 지도골간들로는 남쪽에 임창훈(任昌淇),남성희(南成熙), 남영희(南永熙),심의범이였고 북쪽에는 김춘기(金春起),최동근이였다. 4월 20일부터 전촌민이 총 동원하여 수리건설을 시작했다.

당시 사원들은 비록 전국 각지의 부동한 지방으로부터 모여왔지만 모두 다 한번 이 넓은 벌을 개간하여 잘 살아보겠다는 공동한 목적을 가졌기에 적극적으로 로동에 참가하였다. 인수로방(引水路坊)공사,우물소건설과 기계가설,전기가설,음마하강 보막기, 전간공사등 어떤 일에나 사람마다 있는 힘을 다하여 다그치다보니 5월 20일에 원만히 완성되였다.

사람마다 금년에 꼭 풍작을 거둘수 있다는 신심을 가지고 빨리 파종하려고 조급히 기다렸지만 전력공급부에서 미루고 미루다보니 6월 6일(단오날)에 전기를 보내주었다. 단오날부터 물을 퍼서 논삶이하고 파종하다보니 6월 25일에야 모내기를 끝마쳤는데 시기를 놓쳤기에 가을에 가 벼가 안되다보니 사원들이 갈망하던 풍작은 실망으로 되고 사원들의 정서는 하락되였다.

이듬해인 1958년도 사원들은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는데 비록 생산량은 높지 못했지만 벼는 잘 성숙되였다. 그런데 하반년부터 인민공사 대약진바람이 불어 청장년 로력은 석두구문산과 투도구전수지 공사장에 민공으로 나가고 집에 남은 로력들은 낮에 벼를 벼고 밤에 탈곡하여 또 밤으로 이고지고 가서 벼를 량식창고에 바쳤다.

행여나 량식고생을 하지 않고 살아갈수 있겠는가 했더니 분배받은 량식이 얼마 되지 않으니 또 량식난, 경제난을 면하지 못했다. 이렇게 사원들이 잘 살아보겠다던 희망은 완전히 실망으로 되고 차츰 동요되였는데 차비나 있고 의지할데 있는 사람들은 다 떠나가버렸다.

1959년봄, 조선복구지원 사업운동이 있었는데 사원들은 너도나도 모두다 조선복구사업에 나가겠다고 신청했다. 이러다보니 가지 못할것은 당원, 단원, 로력이 약하거나 사정에 의하여 가지 못할 사람들뿐이였다.

그해 3월 24일, 구태백화점 2층에서 송별회를 열고 렬차로 떠나보내는데 갈라질 때 사람들은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때 구태에서 떠나간 호수는 100여호에 달했다. 나머지 200여호는 여기도 저기도 가지 못하고 또 할수 없이 농사를 지었는데 농사는 전해처럼 잘 되였는데 가을부터 공산풍이 불어 식당화를 실시하다보니 로동력은 식당에서 집체화식을 하고 비로동력은 자기 집에서 화식했지만 모두 마음대로 먹지 못하고 고생을 했다.

고생이 장고생이라고 갈래야 갈수도 없지 앞으로 살아나갈것을 생각하니 막연했다. 사람마다 삶의 신심과 용기를 잃고있을 때 당시 구태공사 지도사업을 하던 김철흠사장은 조선족들의 어려움을 감당하고 새로운 출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조선족들을 집중시켜 독립대대를 세워보겠다는 신념으로 3방 대표인 임창훈, 김춘기,김철신 등을 찾아 반복적으로 상의하고 최후로 청년농장에 집중할데 대하여 의견을 통일시켰다.

이 상의과정에 곡절이 많았다. 오가점이나 상가소과는 농업생산조건을 볼 때 토지가 좋고 수원이 충족하지만 청년농장은 토지가 척박하고 수원이 없으므로 상의초기의 주도적의견은 오가점이나 상가소과에 집중하자는것이였다.

후에 반복적인 토론을 하며 보니 한족대대안에 조선족독립대대를 세운다는것은 사실상 어려움이 많았다. 대신 청년농장은 한족이 적고 이주시키는 사업량이 적은 우점이 있기에 청년농장으로 집중시키기로 했다.

그해 12월말, 구태에서 3개 대대 전체 당원회를 열고 의견을 통일시킨 다음 촌 이름을 신립대대로 결정했다.

방진호

길림신문 2007-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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